5호를 펴내며

청소하고 빨래하는 매일의 가사노동에서 조직의 부품으로서 하는 임금노동, 돈을 주지 않아도 기꺼이 참여하는 사회활동까지 일을 둘러싼 다양한 의미와 경험은 일하는 사람을 소모시키거나 고양시키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바꾸어 버린다.

가사노동, 임금노동은 일의 범주로 많이 생각해왔는데, 사회활동은 일의 범주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신선했다.

돌봄은 무겁고 어려운 일인 동시에 분명 인간의 내면을 살찌우고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한다. (아서 클라인만, 『케어』) 이런 막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여성인 돌봄노동자들은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한다.

(중략)

그는 엄마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남에게 맡겼다는 힐난과 함께 이를 수행하는 돌봄노동자에게 시급 1만 원 이상의 임금은 너무 비싸다고 놀라는 모순된 반응을 마주하곤 했다.

돌봄이 의미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돌봄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여성이 무급으로 돌봄노동을 하지 않으면 여성을 비난하는 현실에 화가 난다.

개미투자자가 하는 일 - 김수현

결정적으로 당대 민주항쟁의 시대정신에 따르면, 불로소득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한 유산계급, 즉 가진 자의 특권으로 도덕적 비판을 넘어서 타도의 대상이었다.

불로소득이라는 말 자체가 노동에 대해 편협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노동자로서의 일만이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주식 투자든, 부동산 투자든,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진입장벽은 있지만, 자산을 분석하고 매매하는 행위도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풀린 돈은 굉장히 많고, 돈은 흔한데, 저는 예전과 똑같이 일해서 같은 돈을 벌잖아요. 이건 가치가 떨어진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서 물가가 뛰고 집값이 크게 오른데 비해서, 임금은 크게 오르지 않은 것 같다. 임금노동에 가치를 낮게 부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는 B가 살아가는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오늘날 불로소득은 가진 자가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추구해야만 하는 가치가 되었다. 그리고 불로소득은 공동체의 손가락질 대상에서 계급 상승을 위한 마지막 희망의 서사로 탈바꿈했다. 불로소득은 청년세대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요새는 근로소득만으로는 집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식이나 코인,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불로소득이라는 말은 대다수가 자본소득을 얻지 않을 때 부정적으로 존재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본소득을 얻어본 경험이 있는 요즘은 불로소득, 자본가 계급이라는 말은 현실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청년세대에게는 자본소득이 기회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주식시장의 상승 이후 주식투자를 새로이 시작한 20대 초반의 대학생 투자자 C에게 주식은 이렇게 정의된다. "삭막한 사회에서 돈을 벌 수 있는 희망. 확률이 높은 로또."

주식을 확률이 높은 로또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것 같다. 높은 위험만큼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로또 만큼 큰 수익을 얻으려면, 보유하고 있는 자본 대부분을 투자해야 할 것이고, 상황에 따라 로또처럼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돈을 다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반대로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게 나태와 게으름의 결과로 이해된다.

주식투자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하지 않는 이에게 나태와 게으름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잘못된 행태라고 본다. 아직 여유자금이 없을 수도 있고, 위험선호도가 매우 낮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유자금이 없고, 돈을 잃고 싶지 않다면 주식투자를 안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본다.

해당 테마와 관련한 주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투자함으로써 시대적 과제에 동참할 수도 있다.

일에는 돈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효과도 있다. 주식 투자를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식 투자도 일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주식투자를 시작했는데, 일상의 주도권은 주식투자에 빼앗기는 위험에 빠진다.

매일매일 주식의 가격변동에 일희일비하는 요즘 투자형태가 안타깝다. 여유자금으로 투자했다면, 장기투자하면 되니까, 일상의 주도권을 주식투자에 빼앗기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동학개미, 어떻게 볼 것인가 - 배세진

사회적 인정을 통해 나의 노동이 가격을 부여받음으로써 관계와 구조를 형성하는 것, 이러한 존재와 인식에서의 전도로 인해 오히려 내가 이 관계와 구조, 즉 권력의 지배를 받는 것이 바로 물신숭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사실 간호사도 전문직인데 사회적 인정을 덜 받아서 전문직이라는 것에 비해 임금을 낮게 받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엄마의 가사노동은 가사도우미의 가사노동과 질적으로 동일한 구체적 노동인데, 엄마의 가사노동에는 아무런 가치가 부여되지 않지만 가사도우미의 가사노동에는 시장이 설정한 가치가 부여되는 상황이 있다.

전업주부도 노동을 하는데 시장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놀고 먹는다는 이미지가 씌워진 것을 보면 안타깝다.

노동자는 일터에서 힘을 잃을 뿐 아니라 적절한 임금 수준조차 지켜 내지 못하게 되면서 '이렇게 일할 바에는 주식투자로 돈을 벌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화폐는 권력이다. 더 많은 화폐를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돈을 더 많이 벌었다는 점을 넘어 사회적 권력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노동소득보다 자본소득이 우위에 설수록 사회적으로 노동자 집단(플랫폼노동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점점 파편화되고 노동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의 집단으로조차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보다 자본가 집단(금융의 모습으로 점점 추상화되어 노동자가 맞서 싸울 수 있는 구체적인 하나의 실체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의 권력이 더욱 강해진다.

자본가 집단은 노동자 집단으로는 가지 않으니까, 점점 노동자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 같기는 하다.

도덕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학적,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내가 주식에 넣은 돈만큼 노동자로서의 내 권리가 줄어든다.

예전에는 노동자 vs 자본가의 대립구조였다면 요새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딱 이분화되지 않는다. 노조 활동에 대한 시선도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로서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같다.

젊은 플랫폼 노동자의 초상 - 조해언

시간당 물류 처리량을 의미하는 UPH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실시간으로 수량화하여 보여준다.

기계가 노동자를 통제하는 상황이라니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느꼈다.

삶의 시간표는 쿠팡이 결정한다.

플랫폼 노동을 하면 주체적으로 살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일하는 동안 UPH 지수를 상당히 의식하게 되며, 관리자의 감시와 통제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지수가 보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지수를 의식하게 되는게 아이러니하다.

노동자의 밤에 일어나는 일 - 최의연

예술은 노동인가? - 홍태림

돌봄을 정당하게 대우하라 - 함선유

돌봄에 종사하는 이들은 노동시장에서 저평가되는 저학력에 경력이 단절되거나 이민자인 여성들이 대다수다. 그런데 동일한 교육수준과 연령, 경력을 가졌더라도 돌봄직 종사자들은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 통상 임금 격차의 합리적인 근거로 여겨지는 노동자들의 속성 차이로는 돌봄직의 낮은 임금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저학력, 경력단절, 이민자, 여성 중에서 경력을 제외하고는 임금 격차의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돌봄직은 다른 분야보다 임금이 낮다니, 돌봄노동자의 대다수인 여성 사회적 약자 계층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시장 내에서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업종을 찾아 헤매는 이민자나 교육 수준이 낮은 고령 여성들이 보수가 낮은 돌봄노동을 감당하고 있다. 불안정한 노동 조건 탓에 이직도 잦다. 그 결과 돌봄직은 양질의 노동자를 유인하지 못하여 돌봄의 질은 떨어진다. 이는 지난 20년간 한국의 돌봄 노동 현장에서 일어난 악순환이다.

돌봄노동자의 보수나 노동 조건이 열악하니, 인재가 찾아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불어 돌봄 노동자에 대한 안좋은 인식도 한몫 하는 것 같다. 중국에서 칭화대 졸업생이 돌봄노동자로 지원했다는 것이 한국에서도 뉴스거리가 됐는데, 명문대 졸업생은 돌봄노동자를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으니까 뉴스거리가 된 것 같다. 보수가 좋고 노동조건이 좋다면 돌봄노동자도 할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일자리를 따라 이동하기 - 임안나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돌봄노동이 글로벌 노동시장에서 임금노동으로 빠르게 '상품화'되면서 돌봄노동을 둘러싼 기존의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다.

돌봄노동이 임금노동이 되어도 보수가 낮다보니, 기존에 무임금으로 돌봄노동을 했던 여성들이 주로 유인됐던 것 같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말을 안 좋아하는데, 그것이 노동시장에 있어서 고정화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동안 루시는 돌봄노동자로 경력을 쌓고 재정 증명이 가능할 정도의 자본을 모으면서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루시도 다른 이주노동자들처럼 언젠가는 이스라엘을 떠나야 하는 단기계약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노동시장에서 보수를 높게 받더라도 불안정한 노동환경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돌봄노동에 전념하지 않고 브로커나 다른 일도 하고 있다. 과연 캐나다에 가서는 단기계약 이주노동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로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 강민정

또한 과로죽음 방지를 위한 지속적 입법 시민운동으로 국민 55만 명의 서명을 받아 일본 국회 및 지방의회에 법제정의견서가 채택되로록 했고, 2014년 6월 모든 정당 만장일치로 과로사방지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일본의 노동 관련법 중 오로지 시민운동에 기반하여 제정된 유일한 법이다.

일본 사람들이 시민운동을 하는 것은 낯설게 느껴지는데, 55만명이나 서명을 받아 과로사방지법을 제정시켰다는 게 얼마나 일본사회에서 과로사가 심각한 문제인지 알게 해준다. 기사에서 택배 노동자나 코로나 업무하는 공무원이 과로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었는데, 우리나라도 이러한 법이 생겨야 하지 않나 싶다.

노동자는 과로와 죽음의 연결 지점인 일터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과중한 일을 이겨 내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아 최대한 자신을 몰아세우게 된다.

적은 인력으로 많은 일을 해치우려고 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사고는 흔한 것 같다. 일을 많이 시킨 직장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제시간에 못하는 자신이 문제인냥 여기게 사회가 만들어버린다.

직장에서의 셀프 디펜스 - 최하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 최수근

10년을 버텨도 생활임금은 물론이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하다.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알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임금은 최저임금보다 낮다니 아이러니하다. 한국어는 누구나 가르칠 수 있는 일이야!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작성
시원한_형

와 리리님 대단해요

진짜 짱짱...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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